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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4학년 때 우리 학급에는 피부가 새하얗고 예쁘장한 최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다. 은색테 안경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두 눈은 항상 우리를 한곬으로 집중시켜놓았고 가디건처럼 걸치고 다니던 블라우스의 색상은 한창 복장에 예민해있던 우리 녀학생들에게 신선한 화제거리가 되군 했었다. 특히 최선생님의 글씨체는 아주 독특하였는데 어느 순간 나는 선생님의 글씨체를 열심히 모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다. 바로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선생님이 되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인민교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나름 ‘선생님’이란 호칭을 가지게 되였다.
긴 학창시절에서 선생님과 함께 한 시간은 단 2년뿐이지만 최선생님은 내 기억 속에 가장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선생님이시다. 지금 돌이켜보면 세살 난 아들애를 가진, 요즘 새댁들과 비하면 육아에 지칠 대로 지칠 법한 시기셨지만 주말이면 우리들을 집으로 불러 맛있는 음식도 해주시고 랑독련습도 시켜주시고 공기놀이도 함께 해주셨다. 흑룡강성이 고향이신 선생님은 료리솜씨도 일품이셨는데 처음으로 ‘가지감자볶음(地三鮮)’을 먹어보고 지금까지 감자마니아로 살아올 정도이다. 아니, 맹물에 밥을 말아먹어도 선생님 댁에서 먹는 밥은 꿀맛이였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제 집 나들듯 선생님 댁에 자주 다녔고 어느 한번 근처를 지나다가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서 “용이(아들이름) 뭐 합니까?”라며 문을 떼고 들어간 적이 있었다. 금방 잠들었다고 낮은 소리로 말씀하시던 선생님은 얼른 주방에서 삶은 닭알 하나를 가져다주시는 것이였다. 멋적게 인사를 하고 나오며 한입 뚝 떼여먹었더니 세상에! 삶은 닭알이 그렇게 맛있는 것이였다니!
사랑을 받는다는 건 늘 설레는 일이고 행복한 일이다. 어쩜 최선생님한테서 받은 후덕한 사랑과 기분 좋은 경험들 때문에 지금 내가 마음껏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커왔는지도 모른다.
최선생님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줬다면 나에게 배우는 법을 배워준 스승이 계신다. 바로 나의 석사지도교수님이시다. 선생님께서 첫 수업시간에 내주셨던 숙제는 아마 평생 가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교과서 제1부분을 8000자로 요약해오라는 것이였다. 800자의 일기를 적으라 해도 어떨가 싶은데 8000자라니! 막막했지만 첫 과제인지라 나름대로 글자수를 채워 바쳤다. 그런데 두번째 주에는 ‘쏘쒸르의 언어관에 대한 생각’을 8000자로 써오라고 하였다. 갈수록 태산이였다. 요약은 그나마 중요한 부분들을 찾아 적어놓는 것으로 얼렁뚱땅 넘겼지만 이건 내 생각까지 곁들여야 하니 ‘석사를 괜히 지원했나, 내가 석사공부까지 할 감이 못되는가?’ 하는 회의마저 들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많은 자료들을 찾아가며 써바쳤고 그렇게 매주 8000자라는 ‘올가미’를 한학기 동안 고집해오신 선생님은 ‘8000자선생님”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되셨다. 그러나 매번 숙제를 해바치면 쓴 내용을 요약해 말해보라 하기도 하고 직접 읽어보시고 부족점과 개선방향을 얘기해주시기도 했으니 그간 내가 섭취한 ‘량식’은 전반 대학과정을 통털어서도 미치지 못할 량이였을 것이다. 그렇게 한두달이 지나니 8000자는 더 이상 넘지 못할 벽이 아니였고 특별한 그 학기가 지나, 그리고 졸업한 지 10년도 넘는 지금 시나 수필 같은 함축적인 글은 몰라도 론문과 같은 글은 체계가 잡히고 자료만 수집되면 자신 있게 손을 댈 수 있는 것이 다 그 8000자의 덕분이다.
그러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니 어쩐지 허전한 감이 들고 걱정이 앞설 때가 많았다. 스승이 없었던 것이다. 나를 바라봐주고 받쳐주고 인도해주는 스승이 항상 있었는데 직장에는 스승이 없었다. 홀로서기에 길들여지지 못한 나는 스스로 외로움에서 헤여나올 방도로 스승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별로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두 스승을 찾아낼 수 있었다. 조용하면서도 빛나는 가을밤의 별과도 같은 분들이셨다. 모두가 우러르는 직위를 가진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화려한 모습도 아니지만 내 눈에는 가장 멋지고 존경스러웠다. 무엇보다 한번 본 글은 절대 잊지 않을 정도로 일에 책임, 열과 성을 다하며 글 또한 예쁘게 쓰시는 분들이셨다. 나는 그분들의 일을 하는 모습, 살아가는 모습, 심지어 미소 짓는 모습까지 따라하기 시작했다. 마치 소학교시절 선생님의 글씨체를 모방하던 것처럼. 그분들을 따라하다보니 외롭지도 않았고 출근길이 마냥 신나기도 하였다. 그분들과는 대화 몇마디 못 나눠보고 그저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나 할 정도였지만 늘 나의 거울이고 스승이였다. 그렇게 5,6년이 지난 어느 날, 처음으로 만난 사석에서 ‘스승’은 ‘류류상종’이라는 말씀을 꺼내시는 것이였다. 그 순간의 감동을 무엇이라 형용할가, 내가 스승으로 여겼던 분이 나를 ‘같은 류’로, 이쁘게 보고 있었다니 그보다 더 가슴 벅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분은 얼마 전 자신의 글에서 이런 말을 남기셨다. “5년전 내가 너의 꿈이였지만 5년후 네가 나의 꿈이 될 수도 있다.”
스승의 모습이 각양각색이고 스승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더라도 결국 스승을 통해 내가 영글어가고 더 좋은 모습의 내가 완성되는 것이다. 학창시절처럼 직접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내가 본받고 싶고 따라가고 싶다면 그 또한 스승인지라. “셋이서 길을 가면 거기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는 법이다”는 말처럼 사실 나의 주변에는 도처에 스승이 있다. 산책하다 예쁜 꽃을 꺾어 엄마 책상에 꽂아주는 딸애가 스승이 될 수도 있고 추운 겨울 먼저 출근하여 사무실을 따뜻하게 덥혀놓는 동료가 스승이 될 수도 있으며 집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문이 열려져있다며 전화해주는 이웃집아주머니가 스승이 될 수도 있다.
‘스승’이라는 이름이 유난히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 계절,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라는 레오 버스카글리아 교수님의 책제목처럼 늘 사랑하며 배우는 삶을 살고 싶다. 나의 모든 스승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