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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6-16 11:58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8,473   추천 : 0  

 

정석숭 구술 리삼민 정리

 

파란만장 87년 인생길에서 잊을 수 없는 사연 많고 많아도 포근한 신혼생활의 이불을 걷어차고 포연이 자욱한 항미원조 최전선으로 달려가던 그 날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1951년 음력설을 앞두고 료녕성 신빈현 오리촌에서 살던 나는 마을의 긴급회의에 참가하였다. 현 무장부에서 내려온 간부가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긴급상태를 보고하면서 쳥년들이 용약 창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때 내 나이 18세, 갓 결혼하였고 우로는 병석에 계시는 아버지가 계셨고 아래로는 철부지 녀동생밖에 없어 소를 먹이고 해야 했으므로 보병하지 않아도 되였지만 많은 한족들도 용약 참군하겠다고 나서는데 조선족으로서 이웃나라 동포들의 처지를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집 식구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신혼의 달콤한 생활을 만끽하고 있던 안해는 그저 울기만 했고 긴 한숨을 톺던 아버지는 나의 손을 꼭 잡고 “가거라, 왜놈들에게 쫓기여 두만강을 건너왔는데 미국놈들이 또 쳐들어 왔으니 나라부터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참군한 후 내가 소속된 부대는 중국인민지원군 40군 후근부 경위영 경위련이었는데 나의 임무는 통역과 긴 량도였다. 미군 비행기의 무지비한 폭격으로 부대는 낮에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밤에 4-50리 길을 강행군했다. 통역은 쉽게 할 수 있었으나 캄캄한 밤길,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수천명에 달하는 부대의 행군을 인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무 수행을 위해 나는 부대가 휴식하는 낮시간을 리용하여 먼저 여러 마을의 로인들께 길을 물어가며 행군 로정을 확정한 후 밤에 길을 안내했다. 나이 어린데다가 수면시간이 부족하여 두 눈은 팅팅 부었으며 발에 물집이 생겨 걷기가 불편한데다가 치질병이 생겨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한번은 길 량도 임무를 완수한 후 치질병이 도져 홍문으로부터 피가 쉴새없이 흘렀다. 영장은 즉시 후방 병원에 가서 수술하라고 명령했다. 수술을 끝마치고 바깥에 나와 앉아있는데 니연리에 있는 편지배달이 아저씨의 편지도 한통 있는데 주소를 몰라 가져오지 못했다고 알려주었다. 오래동안 병이 위중한 아버지와 그리운 안해의 소식을 몰라 기다리던 중 편지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영장이 파견한 낡은 트럭을 타고 니련리 마을로 떠났다. 그런데 떠난 지 거피 5분오 안되여 적비행기 세 대가 저공으로 날아오더니 부대 병원을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저녁 무렵 병원에 와 보니 치료중이던 몇몇 전사들은 모두 희생되였고 내가 있던 침대도 수십미터 밖에 날려갔다. 안해의 편지 한 통이 목숨을 건져 주었다.

 

가정생활이 구차하여 겨우 소학교 5학년밖에 다니지 못한 나는 부대에서 전쟁의 참혹성을 몸소 체험했고 많은 군사지식과 인생의 도리를 깨달았다. 1951년 겨울, 부대가 30여리 되는 목적지로 밤행군을 하는데 나더러 길안내를 하라고 명령했다. 촌동리로 가려면 험산준령을 넘어야 했고 산길이 여러 갈래여서 나는 마을의 40대 조선인을 찾아 길을 안내해 달라고 청을 들었다. 한참 궁리하던 그는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어둠을 헤쳐가며 산길로 접어들었다. 밤 12시가 넘고 꽤나 먼길을 걸었는데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슬그머니 의심이 들어 길옆 오두막에 들어가 로인에게 길을 물었더니 “당신네들이 지나왔소. 8리 가량 되돌아 가오.”고 말하는 것이였다. 사연을 들은 영장은 당장 권총을 뽑아들고 길을 안내하던 조선인들 죽여버리겠다고 야단했다. 왜냐하면 얼마전에 다른 한 부대가 조선인 특무의 꾀임에 들어 적들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아슬아슬한 순간, 나는 선뜻이 나서서 “왕영장,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내가 조선 당시 정부에 알아본 후 처사합시다.”고 말하였다. 날 밝은 후 전화로 군사무소에 련략했더니 우리 길을 안내하던 김씨는 군사무일군이고 촌동리를 가는 산길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증명하였다. 하마트면 죽을뻔 했던 김씨는 참을성 있게 조사연구를 한 후 처사하는 나의 처사에 감동되여 그 후 여러번 우리 부대의 길 안내를 도와주었다. 또 한번은 부대에서 한창 조국위문예술단의 연출을 구경하는데 난데없이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투탄하려다가 우리군의 사격에 명중되여 비행기는 박살되고 비행사는 락하산을 타고 병영부근에 내려왔다. 나는 전사들과 쏜쌀같이 달려가 비행사를 체포하고 날창으로 죽여버리려고 했다. 급기야 따라온 부대지도부에서는 포로를 절대로 학대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군대의 여러방면의 제도를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가정사정으로 비록 부대생활을 1년밖에 못하였지만 스무살도 안되는 내가 가혹한 전쟁년대에 갈고 닦은 굳은 의지와 인생의 도리는 이후 내가 입당을 하고 소학교 교원, 신빈현 민정국 부국장, 교육국 당위서기로 발탁하게 된 밑거름으로 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