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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10 13:06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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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천도교의 교주)는 조선봉건왕조말기 서리집안에서 서자로 태여나 어려서부터 당대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자랐다. 1881년에 동학을 신봉하고 도인으로 되였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당시 북접통령으로서 전봉준(1854-1895)과 합세하여 반침략투쟁을 진행하였으며 갑오농민전쟁이 실패한 후에는 동학의 제2세교주 최시형(1827-1898)과 함께 은거생활을 하였다. 1898년 최시형이 형살되자 동학의 제3세교주로 활동하였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조선봉건왕조의 탄압을 피하여 일본, 상해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이름을 리상헌으로 고치고 망명생활을 하였다. 1906년에 동학을 종교적으로 개편하고 천도교를 창시하였다. 천도교의 교회조직과 기관체계, 교직과 그 임무, 교인들의 자격과 활동절차들을 규제하고 교단을 꾸리는 한편 교리와 종교의식을 확립하였다. 주체8(1919)년 3. 1운동때에는 천도교, 그리스도교, 불교계인사들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손병희가 쓴 글들은 최제우(1824-1864), 최시형의 글들과 함께 천도교경전으로 되였으며 동학사상발전과 천도교철학을 체계화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그는 선행시기에 제기된 동학사상을 계승하고 우주자연에 대한 견해와 사람에 대한 견해, 사회정치적 및 륜리적견해들을 더욱 체계화하였다. 우주자연에 대한 견해에서 그는 천지만물의 생성과정을 물질적인 《기》와 《음양》의 작용으로 설명하였으며 《귀신》도 《음양기》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사람을 《동물의 령장》, 《만물의 극장》이라고 하면서 동학의 《시천주》, 《천시인》, 《인시천인》 사상을 발전시켜 《인내천》범주를 처음으로 정식화하였으며 사람과 하늘과의 관계를 론의하였다. 그의 사회정치적견해는 다분히 사회계약설에 의거하고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의 발전에서 도덕이 노는 역할을 중요시하였으며 농업과 상업, 공업의 발전, 정신문화와 언론이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