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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2-03 10:51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5,159   추천 : 0  

1905년 봄 서울 안현동에 있는 《안현부인상점》이 문을 열었다. 이 상점은 녀성이 직접 경영하고 녀자들이 쓰는 물건을 파는 우리 나라 최초의 부인상점이였다. 상점주인은 헤그밀사사건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애국렬사 리준의 안해 리일정이였다.

당시로 말하면 개화사상이 널리 퍼지기는 했지만 량반은 굶을지언정 학문에 힘써야지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시절이였다. 량반집녀자들은 바깥출입도 삼가해야 했으며 더우기 시장에 나가거나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녀자는 천한 신분으로 간주하는 시절이였다.

이러한 때 이름난 량반집출신이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가서 법학까지 공부한 리준의 안해가 상점을 연것은 하나의 《용단》이 아닐수 없었다.

리일정은 상점에 직접 나와 바늘, 실, 단추, 분 등 녀자들의 필수품을 팔았다. 그의 상점은 친절하고 값도 적당하게 불러 인기가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지어 얼굴을 가리우고 몸종을 거느린 녀인들까지 이 상점에 와서 물건을 골랐다. 한편 리일정에 대한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뒤시비질도 이만저만 아니였지만 리일정은 이 모욕을 참으면서도 인내성있게 상점을 운영하였다.

리일정이 상점을 연데는 까닭이 있었다.

남편 리준은 반일운동을 하면서 망명과 류배, 감옥생활을 련이어 했다.

리준은 1904년에는 《공진회》 회장이 되여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활동을 막는데 힘을 기울이다가 투옥되였다. 이때 《공진회》 회원들이 종로거리에서 시위를 벌리고 격문을 뿌렸는데 리일정은 그에 호응하여 사람들앞에서 연설까지 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결혼후 남편뒤바라지와 집안살림을 도맡아해온 리일정은 녀자는 반드시 독자적으로 생활할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남편의 동의를 얻어 집을 팔고 세집을 얻어 상점을 열었던것이다.

리일정은 헤그에서 남편이 자결한 후에도 아들을 반일운동가로 훌륭히 키워 내세웠다. 그 아들이 해방후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신임에 의하여 조선로동당 북청군위원회 위원장, 초대도시경영상, 사법상을 지내고 1954년 세상을 떠난 리용이다.

리일정은 1935년 58살때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