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봄 서울 안현동에 있는 《안현부인상점》이 문을 열었다. 이 상점은 녀성이 직접 경영하고 녀자들이 쓰는 물건을
당시로 말하면 개화사상이 널리 퍼지기는 했지만 량반은 굶을지언정 학문에 힘써야지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시절이였다. 량반집녀자들은 바깥출입도 삼가해야
이러한 때 이름난 량반집출신이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가서 법학까지 공부한 리준의 안해가 상점을 연것은 하나의 《용단》이 아닐수 없었다.
리일정은 상점에 직접 나와 바늘, 실, 단추, 분 등 녀자들의 필수품을 팔았다. 그의 상점은 친절하고 값도 적당하게 불러 인기가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지어 얼굴을 가리우고 몸종을 거느린 녀인들까지 이 상점에 와서 물건을 골랐다.
리일정이 상점을 연데는 까닭이 있었다.
남편 리준은 반일운동을 하면서 망명과 류배, 감옥생활을 련이어 했다.
리준은 1904년에는 《공진회》 회장이 되여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활동을 막는데 힘을 기울이다가 투옥되였다. 이때
결혼후 남편뒤바라지와 집안살림을 도맡아해온 리일정은 녀자는 반드시 독자적으로 생활할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남편의 동의를 얻어 집을 팔고 세집을 얻어 상점을 열었던것이다.
리일정은 헤그에서 남편이 자결한 후에도 아들을 반일운동가로 훌륭히 키워 내세웠다. 그 아들이 해방후
리일정은 1935년 58살때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