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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3-30 11:54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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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해석학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나는 오랫동안 기독교를 잊고 지내왔다. 나는 1980년부터 주로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심을 두고 일본에서 개최되는 <통일 심포지움>에 참석하였고, 유럽에서 진행된 <북과 해외학자들과의 대화>에 참석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주로 사회변혁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관하여 연구를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많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기독교인들도 조국통일과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나에게 묻곤 하였다. 일단 사람들이 어떤 종교나 사상에 빠져버리면 그것을 믿고 살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미 익숙한 종교와 사상으로 세계를 보며 사회를 보게 되기 때문에 일단 기독교라는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며 역사를 보게 된다. 더욱이 교조적이고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인 관점에서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은 기독교에만이 구원이 있다고 믿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인격체를 가진 인간(person)으로 보지 않고 단지 선교의 대상(object)으로만 여기고 다른 종교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기독교로 개종시키느냐에 온갖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내가 잘 아는 스님은 엘에이의 식품점 앞에서 기독교인들로부터 몇 번 “예수 믿지 않으면 불교인들도 지옥에 가니 예수를 믿으시오!”라는 전도의 봉변을 당했다고 웃으며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들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은 아주 도전적이다.

 

특별히 나는 이북 학자들과 대화하고 이북 동포들을 직접 방문하여 만나보면서 이북 동포들도 우리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조선사람들인데도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이북 동포들을 뿔난 <붉은 귀신>들로 대하는 것을 보고 무엇인가 이남과 해외의 기독교인들이 절대적으로 믿는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해방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조국통일에 도움이 되는 대신에 큰 방해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교조적이고,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신학에서 해방한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보수적인 기독교 교회에 다니면서 도저히 꽉 막힌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털어놓는 많은 분을 만나곤 했다. 나는 그러한 교조적인 기독교인들을 나무라기보다는 그들에게도 자기들이 신념화한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해방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절대화한 신앙, 신학으로부터 해방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연구한 것이 기독교 신학과 철학이니 한번 용기를 내어 <신학의 해방>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도 눈과 마음을 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우리 민족의 한 부분인 이북 동포들도 애정을 가지고 볼 수 있도록 노력해 보려고 한다.

 

<아카데믹 신학>에 오랫동안 종사해온 분들이나 그러한 신학을 한 분들이 목회하는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나와 오랫동안 대화를 하고 나서는 깜짝 놀라 어찌할 줄을 모른다. 더구나 그들이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가 그 당시 모든 유대인의 주인이요, 유대를 로마에서 구할 메시아였듯이 나와 해 내외 동포들은 모두 지금 코리아의 주인이요, 코리아를 현재의 제국주의와 지배계급에서 구할 메시아라고 주장하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도대체 내가 한 신학이 어떤 신학이냐고 묻는다. 구속론, 귀신론, 재림론, 종말론, 타락론, 등등의 신학적 용어를 늘어놓으면서 나를 공격한다. 나는 시카고의 하이드 팍에 있는 매코믹 장로교 신학교를 다닐 때 위의 주제들에 대하여 유명한 신학자들의 용어를 빌려가면서 많은 논문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문들을 쓰고 난 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을 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곤 했다. 이것이 아카데믹 신학의 특징이다. 나의 실제 생활과 별로 관계도 없는 연구를 단지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루하고 고달픈 일이었다. 구체적인 인간의 생활문제를 다루지 않고 이해하기 힘든 용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목사 되는 것을 포기하고 시카고대학의 사회과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 어느 날 엘에이에서 개최되는 기독교 청년들의 겨울 캠프에 강사로 초청받아 갔을 때 거기에 정식 주제 발표를 맡지 않았던 한 강사는 연설하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

“내가 작년에처럼 강연문을 써서 여러분에게 읽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말일 겁니다. 그러나 오늘은 원고 없이 나의 가슴 속의 진실을 고백하는 것이니 모두 진짜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서구신학에 몰두하면서 여러 논문을 썼으며 많은 설교를 하였다. 그 논문들은 모두 논리적이고, 변증법적이고,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종합적이며 무례한 용어가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논문들과 설교를 다시 읽어도 전혀 생소한 글을 읽는 느낌이다. 내가 쓴 글인데도 꼭 다른 낯선 사람이 써놓은 글을 읽는 기분이다. 그것은 내가 실제적인 인간들의 생활문제를 떠나 단지 논리적인 신학적 용어를 가지고 오랫동안 씨름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인간들의 구체적 생활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나는 1979년 신학교 졸업반 때 중동을 한 달 방문하는 여행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를 거쳐 이스라엘을 순례하면서 주로 아랍과 이스라엘의 관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과의 관계를 현장에서 연구하는 세미나였다. 그때 나는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의 지도자 아라팟을 직접 만나 그들이 왜 극한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처절한 호소를 들었다.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쫓겨나 여기저기 비참하게 사는 팔레스타인 피난민들의 피난민촌들도 방문하여 그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리고 돌아왔다.

 

그 후 나는 변하기 시작하였다. 만약에 지금 다시 예수가 재림한다면 내가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시카고 하이드팍이 아니라, 아랍과 이스라엘과의 갈등,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과의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과의 갈등, 제국주의 세력과 제삼세계와의 갈등 한가운데에 내려올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비로소 내 조국 코리아반도의 분단 문제와 제국주의의 신식민화 문제, 지배계급의 착취 문제, 그리고 종교 문제들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예수가 만약 코리아 반도에 재림한다면 분명히 휴전선에 내려와 분단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는 종북으로 몰려 통일을 반대하는 제국주의와 독재자, 기독교인들에 체포되어 십자가에 다시 못 박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는 추상적인 아카데믹 신학이 아니라 모순에 찬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고 개선하는 사회변혁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 나 자신을 헌신하는 데서 출발하는 <해방신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이것은 아카데믹 신학자들에게는 유치한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여러 신학이론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대신 구체적인 사회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념들을 세밀히 검토하여 그 이념들과 성서의 말씀을 연결해 구체적인 사회의 산 인간들의 생의 상황에 맞게 해석함으로 성서의 말씀을 산 메시지로 변화시키게 한다. 만약 지금의 보편적 신학(universal theology)을 어느 곳에나 적용하려고 시도한다면 그러한 신학은 특정한 사회의 특정한 지배층의 지배논리를 대변해주는 역할밖에 못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특정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란 이미 그 사회의 지배층의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성서의 진리라도 쉽게 지배층의 것으로 즉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 변할 위험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층의 것이었다”고 지적하였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에서 강조한 민중들의 실제적인 의식주 문제와 질병의 치료와 양심수의 석방 문제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회적 실천>만이 신학이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추상적 개념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종교를 믿었느냐, 얼마나 교회를 열심히 다녔느냐, 전도를 얼마나 많이 하였느냐, 헌금을 얼마나 많이 내었느냐, 안식일을 지켰느냐, 십일조를 내었느냐 하는 것이 전혀 최후심판의 표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물을 주고, 헐벗었을 때 입을 옷을 주고, 병들었을 때 찾아주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위로해 주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랑의 행위>가 바로 <최후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은 결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추상적인 죄>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고난받고 착취당하는 인간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모여 그 해결책을 의논하기 위함이다. 교회가 이러한 사회 구원적 기능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립하여 값싸게 진리를 팔며 영적 구원에만 몰두하여 자기 성장에만 힘쓴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사업체이지 예수의 인간구원 운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성서의 말씀은 어느 사회에서도 창조적이고 해방적인 살아있는 말로서 지금 현재 살아서 활동하는 산 예수들의 말로 재창조되어야 한다. 약 2천 년 전에 써진 성서의 말씀이 문자 그대로 우리의 활동에 표준이 될 수 없다.

 

성서의 말씀이 죽은 문자로 머물러 있지 않고 지금 여기서 살아서 활동하는 산 예수들의 생생한 말로서 실제적인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힘을 지니게 하려면 새로운 성서의 해석학(hermeneutic)이 필요하다. 나는 이러한 성서의 해석을 “예수는 흑인이다.”(Jesus is black.)라고 주장한 흑인 신학자 제임스 코운(James Cone)에게서 배웠다. 그의 책 [흑인해방신학](A Black Theology of Liberation)에서 성서를 새로이 해석하는 방법을 우루과이 신학자 서군도(Segundo) 신부 자신이 배운 것을 소개해보려 한다. 서군도 신부의 책 <The Liberation of Theology>(신학의 해방> 25페이지부터 34페이지까지를 참고해보기 바란다.

 

흑인해방신학자인 제임스 코운의 신학은 억압받는 흑인들의 실제 상황에 비추어 하나님의 존재를 연구하여 그 해방의 힘을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데서 출발한다. 코운에 의하면 피압박민들이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갈망하는 내면적 충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코운은 그러한 신학이 아카데믹 신학에 끼치는 놀라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특수한 역사적 지역사회(예, 흑인 사회, 인디안 사회, 라티노 사회, 코리안 사회, 등등)에 필요한 신학을 확립해 나간다.

 

코운은 그의 책 33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흑인신학은 단지 흑인 지역사회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아카데믹 신학자들이 제기하는 무수한 비평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소비하려 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흑인해방> 과정에서 유일한 진리란 억압민들인 흑인들 자신이 투쟁하는 가운데서 정의하는 바의 <해방의 진리 그 자체(Truth of Liberation Itself)>뿐이라는 것이다. 이남의 노동자들, 농민들, 세월호 가족들이 현재 벌이고 있는 해방운동 과정에서 유일한 진리란 유명한 신학자들이 써놓은 논리적 글도 아니며, 보편적 구세주, 예수를 언급하는 설교가 아니라, 그들의 투쟁 한가운데서 그들이 정의 내리는 해방의 진리 그 자체일 뿐이다. 단지 얼굴이 검다는 이유로 백인들에 천대를 받는 흑인들의 슬픔을 가슴 저 밑바닥에 간직하고 있는 흑인신학자 코운은 위에 언급한 그의 책 33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혁명적인 상황은 흑인신학에서 무엇이 행동과정에서 옳은지 그른지를 다루고 있는 일체의 추상적인 원칙들을 피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흑인신학의 생각과 행동을 안내해주는 한가지 원칙이 있으니, 즉,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해방 사업을 구현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흑인 지역사회에 무조건 헌신하는 일이다.”

 

이남에서 1980년 광주의 대량학살사건과 그 후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많은 선량한 코리안들의 희생, 최근의 세월호에서 죽은 300여 명의 어린 학생들의 죽음, 등은 나의 신학에서 나의 행동과정을 규정지어온 일체의 추상적인 도덕적, 혹은 종교적인 원칙들을 피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나의 신학의 생각과 행동을 안내해주는 한가지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광주에서, 노동현장에서, 민주화와 통일투쟁 한가운데서 피로 항쟁하며 해방의 사업을 실현하려고 애쓰고 있는 살아있는 코리안 예수들의 투쟁에 무조건 헌신하는 일뿐이다. 나의 메시아는 1980년 광주에서 총을 잡고 인간 잡는 귀신들에게 달려든 사람들, 세월호에서 왜 자식들을 구출하지 않았는지 그 원인을 규명하려고 애쓰는 세월호 가족들, 생존투쟁을 하는 노동자 농민들 각자 각자일 뿐이지 다른 사람일 수가 없다. 이것이 제임스 코운과 내가 성서를 해석하는 첫 출발점이다.

 

억압과 착취구조의 분석

 

새로운 성서해석은 위에 언급한 구체적인 억압과 착취를 받는 민중들의 투쟁활동에 무조건 나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편견>에서 출발하여 두 번째의 단계에 들어가는데, 그 두번째는 구체적인 사회 속에 존재하는 <억압과 착취구조>를 파헤치는 일이다. 왜냐면 대개는 억압과 착취구조는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 않고 여러 이데올로기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면, 지금까지 코리안들은 미국이 공산주의를 막아주는 선량한 <구세군>으로서 이북의 침략을 막아주는 <천사의 나라>로 꼭 믿어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이남 전체에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구세군 천사의 나라 미국이 반공, 반북, 종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니까 자기 민족끼리 원수가 되면서까지 이남 민중들은 반북놀음을 벌여왔다. 그런데 <광주항쟁>을 비롯하여 <천안함 사건>, 최근의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 이남 민중들은 코리아의 근본적인 착취와 억압의 구조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제 이남 민중들은 차차 미군을 구세군으로, 미국을 천사의 나라로 믿지 않게 되었다. 코운은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들을 학대하고 처참하게 대해온 사실을 지적하면서 착취와 억압의 근본원인은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여러 사회계급을 형성시키는 경제적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 심리에 더 깊이 뿌리박고 있는 인종차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코운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불행하게도 미국의 백인신학은 흑인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백인신학은 인디언의 대량학살과 흑인의 노예를 종교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백인 지배자들의 신학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진보주의 신학이건 보수주의 신학이건 신학이란 흑인들에게는 단지 죽음을 뜻할 뿐이었다” (위의 책 22페이지)

백인신학에 영향을 받은 이남의 대부분의 기독교회는 불행하게도 코리안들의 해방운동인 민주화운동, 자주화운동,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남 기독교회들은 반공, 반북에 앞장서왔기에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코운은 미국의 백인신학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미국 신학은 보편적 인간과 관련지어 죄를 추상적으로 논하고 있다. 백인신학에서는 죄란 이론적인 생각이지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단지 색깔 때문에 사람들이 고난 당하는 사회에서는 색깔이 없는 하나님은 흑인신학에서는 차지할 자리가 없다.” (120페이지)

 

그래서 코운은 흑인 지역사회에서 <예수는 흑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8.15 광복 후 과거의 이남 역사를 보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이 있었을 때나 천안함 사건과 세월호 사건이 있었을 때도 자기 구원만 받겠다고 교회당에서 기도나 하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들이 믿는 예수는 구체적인 이스라엘에서 살다가 로마와 헤롯당과 종교집단에 정치적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은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루과이 신학자 서군도(Segundo) 신부는 그의 책 28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인간이 보편적이고 영적이려고 의도하면 할수록 구체적인 해방의 문제를 도외시할 위험이 더 많이 존재한다.”

따라서 서군도 신부는 <보편주의>와 <영적주의>는 ”신학의 이데올로기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한다.

 

새로운 성서해석

 

새로운 해석학의 제3단계는 이와 같은 피압박민들의 해방을 진리 자체로 보고 억압과 착취구조를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구조들을 드러냄으로 새로운 신학적 경험을 가지고 신학에서 그러한 거짓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성서를 새로이 해석하는 단계이다. 코운은 구체적인 흑인 지역사회에서 “흑인 신학자들은 흑인 지역사회에 필요한 재료들과 규범 위에 신학을 구축함으로서 백인사고의 타락한 영향을 저지시키는 방향으로 일해야 한다.”(53페이지)고 말한다. 흑인들은 그들도 인간이며 백인들처럼 인간답게 대접해주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신학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억압민을 위한 새로운 해방의 신학은 성경보다는 오히려 그 억압민들의 역사, 문화 그리고 실제적인 그들의 경험 등을 먼저 연구해야 한다고 코운은 주장한다.

 

이미 <신학적 체계>를 확립해 놓고 그것도 자신들이 속해있는 교파의 신조나 교리로 역사를 해석하는 아카데믹 신학자들에게는 이러한 접근은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아카데믹 신학을 오랫동안 한 신학자들과 내가 자주 충돌하는 문제가 바로 이점이다. 1980년에 일어난 광주사건을 구체적인 미국의 악의 마수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학적 체계로 풀이나 하던 아카데믹 신학자들이 얼마나 현실을 왜곡 시켰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특히 문자주의적이고 절대적인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의심을 제거시킴으로 하나님과 국가란 이름으로 모든 종류의 정치적인 압박을 정당화하고 있다.

 

우리는 유신 시대에 김종필이가 “종들아, 상전에게 복종하라”는 로마서 문구를 인용하면서 독재정권에 복종할 것을 강요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백인신학자들이나 이남의 대다수 기독교회는 마치 <무저항>만이 기독교 사랑의 유일한 표현인 것처럼 억압민들에게 무저항을 격려하고 있다. 제국주의와 지배층들은 중무장하고 선량한 민중들을 억압하고 죽이는데도 조용히 있으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뺨도 내놓아라>는 가르침은 제국주의자들과 지배계급들이 선량한 노동자들과 농민들, 그리고 청년 학생들을 마구 잡아 죽이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데 이용될 수는 없다. 제임스 코운은 그의 책 62페이지에서 “우리는 1세기에 행한 예수의 행위를 20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행위를 안내하는 데 문자 그대로 이용할 수가 없다. 성서가 우리의 결단을 내리는 안내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남 총인구 4분의 1이 기독교인인 이남교회는 더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이남 민중들은 충분히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이남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도대체 살아있다면 코리아전쟁에서, 광주항쟁에서, 천안함과 세월호에서 무참하게 죽은 선량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제발 설명해달라는 것이다. 소위 기독교 국가로 자처하는 군 통수권을 가진 미국이 어찌 선량한 코리안들을 대량학살하는데 군대를 동원하도록 명령할 수 있는지 대답 좀 해보라는 것이다. 반공, 반북, 종북놀음을 벌이게 하여 남북을 이간시키고 계속 군사연습을 하면서 분단관리나 하며 비싼 대량 살상무기나 이남에 팔아먹는 미 제국주의의 거대한 악의 힘을 제거시키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코리안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코리안 신학’의 방향과 규범을 특징지어줄 질문들이다.

 

살아있는 예수들

 

이러한 새로운 성서해석을 통하여 우리는 살아서 활동하는 흑인 메시아를 미국에서 발견할 수 있고 코리안 메시아를 이남에서 발견할 수 있다. 메시아는 결코 1세기의 예수 활동에 국한될 수 없고 단지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 하나님이 여러 사람을 통해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속하여 역사 속에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활동한다면 그에 관한 진리도 역시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남의 메시아는 1세기에 활동한 예수가 아니라, 현재의 제국주의와 독재자들, 그리고 가야바같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대항하여 이남 민중의 의식주 문제와 질병의 문제, 그리고 양심수들의 투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투쟁하는 메시아이다.

 

이와 같은 능동적인 <해방의 종 메시아 상>이야말로 <새로운 해석학>의 근본을 이루는 것으로 깊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이남 기독교를 치유하는 약이 될 것이다. 일단 종교든, 철학이든, 이념이든 한 사상에 빠져버리면 그것을 살게 된다. 그래서 <해방의 신학>을 이야기하기 전에 <신학의 해방>을 강조하는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역사의 주인은 의식화된 민중이다. 이러한 각성한 민중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가도록 에너지를 제공하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새로운 교회는 종래의 제국주의와 지배계급의 거짓 이념을 신비적으로 표현하던 아카데믹 신학에서 해방할 때 가능하다. 그럴 때만이 어떻게 억압의 구조에서 민중을 해방할 것인가 하는 <해방신학>, <사회변혁사상>에 전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신학의 해방]이라는 연재 글을 통하여 해 내외 코리안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신학의 해방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