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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07 09:49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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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 록음테프와 반쪽사진에 남겨진 렬사딸의 평생여한
박영철선생은 연변주검찰원 기술처 제1임 처장으로 퇴직한분이다. 퇴직 3년 앞두고 고골두무균성괴사병으로 대퇴골수술을 받았다. 수술후 4년간이란 후속치료로 퇴직할 때에 이르러서는 장시기의 약물복용 미열로 신장기능쇠약과 뇨독증까지 덮쳐 또 3년간을 뇨독청치료를 받으면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엎친데 겹친다고 때를 같이해 안해의 퇴행성관절염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2003년 부부는 심사숙고끝에 연길집을 팔고 두분의 병치료에 리롭게끔 해남도 삼아시로 이사를 갔던것이다. 건강도 어느정도 회복되여가던 2010년 연변주인민검찰원의 배려로 검찰원가족아빠트 한채를 다시 사서 들게 되면서 《여생의 숙제》를 완수하는 려정을 시작한것이다.
박선생은 자신의 회한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친인들을 처참하게 잃은 아픔과 외로움을 평생 안고 사신 어머니가 자식들한테 외할머니와 외가집의 혁명이야기들을 틈틈이 들려주시던 기억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나는 대학에서 부대로 가서 군생활을 하다가 지방부대로 옮겨왔으며 제대해서는 검찰원 기술검찰관이란 특수사업을 하다보니 어머니와 긴 이야기를 나눌 편안한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일이 바쁘다는 핑게로 명절 같은 때나 한번씩 찾아뵙는게 고작이였고 운신이 불편한 어머니가 아들집이라고 다녀가신적은 단 한번뿐인걸로 기억된다. 그때 어머니는 내 사업에 방애가 될가봐 하루만 묵으면서도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고 《이제 시간날 때 자네가 외할머니 초상화를 하나 그려다오…》하고 부탁했다.
하긴 꼭 외할머니의 초상화를 그려내겠다고 어머니한테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 약속을 지켜드리기전에 어머니께서 1995년, 내가 퇴직하기 5년전에 타계하실줄이야. 나는 그제야 내가 얼마나 큰 불효를 저질렀는가를 깨닫고 가슴을 친다.
외할머니와 외가편의 영광스러운 혁명이야기들을 어머니한테서 쉽게 언제든지 들을수 있을것이라고 시름놓고 살아온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는 통한을 나는 떨쳐버릴수 없다.
최계옥렬사의 딸이 남긴 음성록음테프와 사진 ./사진:박영철
20년전 어머니가 나한테 록음테프와 사진 두장을 남기셨는데 나는 2010년에야 비로 소그것을 풀어보았다. 3년전에 병치료를 위해 연길집을 팔고 해남도로 갈 때 지인집에 무져두었던 책꾸레미들을 찾아 풀다가 그속에서 손수건으로 꽁꽁 싼 무엇이 나져 헤쳐보니 록음테프 두곽에 종이로 싼 사진 두쪽이 나왔다. 아무런 설명같은것은 없었다.
《아, 그 테프-》
년로해지면서 어머니는 연길에 떨어져 사는 나한테 늘 하실 말씀을 다 못한 아쉬움 같은것을 안고계시는 눈치였다. 그때에는 지금처럼 가정전화도 없기에 수시로 대화할수도 없었다. 신변에서 어머니의 외로움을 달래드리지 못하는 걱정에서였는지 나는 훈춘에 사는 동생한테 어머니의 회상이야기들을 록음해 두라고 부탁한적이 있었다. 바로 그 테프였다. 어머니가 동생더러 《이건 아무때건 꼭 둘째형한테 주라》 했다던 그 테프, 어머니가 돌아가신후 어머니의 소지품속에서 나온 그 테프였다.
어머니와 대화하며 록음을 했던 동생이 그때 《별 특별한 말씀은 없었소. 그냥 외할머니, 외가집의 이야기…》라고 말한 기억은 생생하지만 이제 와서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손수건을 풀면서 나는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가 15년이니 록음한 시간은 20년 푼히 된다. 나는 어머니가 외할머니, 그리고 외가집의 항일혁명이야기들을 평생 편히 풀어놓지도 못한채로였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았다.
테프가 하도 오래되여서인지 어머니 말씀이 가담가담 끊기군 했고 많은 대목은 흐릿했지만 외할머니의 사적, 어머니의 아픔과 그 절절한 그리움이 그대로 나한테 전해왔다.
《머리태를 말꼬리에 매고 그 골안길을 끌어내렸다니 …흑흑…》
늘 그러듯이 외할머니 순난때의 정경을 말할 때면 어머니는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 이젠 내가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갈게요…》 하고 나는 록음기에 대고 저세상에 계시는 어머니한테 또 한번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그런데 테프와 함께 싸여있는 두 초상사진은 무엇일가?
젊은 남자의 얼굴은 외할머니나 어머니가 오매불망 걱정하고 기다리던 외할머니의 외동아들이자 나의 외삼촌인 최동호의 사진이였고 얼굴반쪽만 남은 손톱눈만한 중년녀성의 사진은 다름아닌 외할머니의 초상이였음을 판단할수 있었다.
문화대혁명때는 혁명가 어머니, 혁명가 형제를 둔 우리 어머니한테도 마음을 조이고 살아야 했던 불운의 시기였다. 외할머니의 렬사증을 발급받았지만 외할머니와 함께 혁명하다 쏘련으로 파견된 외삼촌이 행방불명으로 되였고 작은이모 최현춘이 조선으로 갔으니 우리 어머니는 자유로울수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우리 집에서 외할머니나 외삼촌과 작은이모의 사진은 문화대혁명후에야 비로소 다시 볼수 있었다. 하루는 우리 형제가 다 모여앉은 자리에서 어머니는 《없앴다》던 외삼촌 사진과 어머니네 3자매가 찍은 사진이며를 우리한테 보여주시면서 《외할머니의 사진도 한장 있었는데…》하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우리는 그 말을 그저 흘려보냈었다. 오늘에 와서 우리 형제는 그 손톱눈만한 사진이 바로 어머니가 문화대혁명시기 외가편 《위험소재품을 없애》려다 다시 감춰둔 외할머니의 사진이 아닐가 하고 추정해본다.
어머니는 평생 말수가 적었다. 미술을 좀 알고 검찰원 기술처에서 일한다는 나한테 얼굴 반쪽만 보고 원상 복구해 그릴수 있느냐고 물은적 있는 어머니가, 그 타다남은 반쪽 사진을 보고 외할머니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으로 록음테프와 함께 손수건에 꽁꽁 싸두었던것이 분명했다.
그 손수건에는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산》- 어머니의 아픔과 그리움이 싸여있었고 간절한 기탁이 간직되여 있었다.
근거지를 지키고 동지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당신의 한몸을 불태운 외할머니, 그 재더미속을 파헤쳐 타다 남은 외할머니의 유해를 움켜쥔 어머니…
그 참상이 점점 또렷이 머리속으로부터 눈앞에 떠오르면서 나를 괴롭힌다. 그러면서 나는 무시로 밀물처럼 밀려오는 아픔과 두려움에 모대긴다. 어머니가 매양 이야기 뒤끝에 하시던 《그저 그렇게 그 땅에 묻혔구나, 나라도 가봐야 하는데…》 하던 말씀이 귀전을 때린다.
이제 우리세대까지 저세상으로 가고나면 외할머니나 외가편의 혁명이야기들은 세월속에 영영 묻혀지겠구나 하는 두려움과 긴박감에 나는 소스라쳐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아니 우리는 귀중하고 자랑스러운 력사를 그저 덤덤히 무심히 세월의 배에 흘려보냈던것이다! 또 지금도 계속 흘려보내고 있지 않는가!
어머니가 돌아가신후부터, 특히 퇴직후 나는 숙제를 채 못한 사죄 , 아니 숙제를 반드시 해내야 하는 각오로 연변도서관, 연변대학도서관, 연변박물관을 찾아가 조선족혁명사료들을 꾸준히 훑어나갔다.
또 연변대학 사학자 박창욱, 고영일, 권립, 흑룡강성당사연구소 전임 소장 김우중 등 조선족력사 전문가들을 방문하여 조선족항일혁명사료에 대해 자문, 학습하였으며 유관 사료 근 30권을 탐독했다. 그러면서 남겨놓은 노트만도 7,8책 된다.
력사노트를 제시하며 기자와 교류하는 박영철선생 / 사진: 김태국
70고개를 넘으면서라도 조선족항일사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할수 있어서 나는 그나마 다행스러워했다. 비록 사료들에서 외할머니 명함 석자도, 그리고 외가편 다른 어느 항일혁명자들의 이름석자도 찾아볼수는 없었지만 나는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편 렬사들의 혁명발자취를 력력히 훑어나갈수 있었다. 외할머니와 외가편의 항일이야기는 거창한 조선족혁명력사의 하나의 축도였으니까…
 
제4편 -
혁명유적지 답사길에 오른 고래희의 박씨형제
말하자면 박선생한테는 형님(82세), 누나(81세) 그리고 동생(69세)이 있다. 형님은 동북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훈춘제2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퇴직, 연변사범학교를 나온 누나는 흑룡강성 목단강시조선족소학교에서 퇴직, 연변대학을 나온 동생은 훈춘시 반석중학교에서 퇴직하였다. 아들 하나 딸 셋을 둔 최계옥렬사한테 남은 후손이라면 이들 박씨형제들이다.
박선생과 형제들은 기자에게 《그 힘들었던 세월에도 우리형제가 공부를 견지할수 있었던것은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편 혁명지사들의 영향과 갈라놓을수 없다는것을 우리 네형제는 명기하고있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후 외할머니의 렬사증을 형님이 간직하고있었는데 형님이 여든살 되는해 즉 2년전부터는 박선생한테로 옮겨졌다고 한다.
2011년 7월경 박선생은 외할머니 최계옥렬사의 그 반쪽 초상사진을 들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끝끝내 연변대학 미술학부로부터 항일투사인 외할머니의 존용을 복구해냈다.
사진을 들고 기자를 찾아온 박선생은 《나는 외할머니를 만나뵈는듯하고 외할머니께서도 웃으시며 나를 바라보시는듯 하다》며 이제 외할머니의 혁명유적지 답사를 더는 늦출수 없다고 한다.
일행은 우선 안도현 민정국을 찾아갔다. 박씨형제의 찾아온 사연을 듣고 안도현 민정국 리동국국장은 당장에서 민정국 유관부서 일군을 불러 《처음 듣는 력사사건이고 렬사들의 명함도 안도에서는 모르고 있는 사정이다. 이와 같은 우리현내 력사사건에 대해 수집, 조사하고 고증하는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며 최계옥렬사유적지 답사에 관해 포치하고 동행하기로 했다.
우리일행이 석문진에 다달으니 석문진정부의 민정조리 박순남, 중평촌의 현임 당지부서기 량희영 등 현지책임자들이 련락을 받고 벌써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65년만에 보는 고향이 산도 물도 몰라보게 변했다며 박씨형제는 감개무량해한다.
끝내 찾아낸 그 처절했던 형장 터
최계옥렬사의 순난지를 찾는 일은 쉽지않았다. 박씨형제는 학교와 가까운 곳이였다는 어머니의 얘기를 떠올려 우선 학교자리부터 찾자고 했다. 그런데 중평골에 과거 학교가 7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다 사라졌다하니 찾을길이 막연했다. 동흥툰도 중평촌과 합병되여 지금은 다 중평촌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여 일행은 두조로 나뉘여 우선 마을의 년장자들을 찾아 선색이라도 쥐는 지름길을 택하기로 했다.
중평 9대에 사시는 86세나는 남봉녀 등 로인을 찾았으나 기대와 달리 《그 때 일본놈들이 여기서 하도 나쁜 일을 많이 저질러 어느 일이 어느 일인지 어렴풋해진다》며 나름 얘기하는건 다른 기억들이였다.
최계옥렬사의 큰외손자 박증수(오른쪽 첫사람)로인이 중평촌로인들이 모여활동하고있는 집에서 외할머니에 관한 이야기실마리를 찾고있는 장면./사진:김파기자
그러다 중평4대에서 우리는 중평촌의 《로지부서기》로 불리우는 중평촌 원 당지부서기 리득명(78세, 그 이듬해 병고)로인을 찾았다. 리로인은 4세부터 중평촌에서 살아온 토박이였다. 최계옥렬사의 사적을 듣고 리로인은 명함은 똑똑히 기억나지 않으나 《동흥에서 중평으로 오는 어구지》에서 최씨녀성 한분이 박락순이란 놈의 말꼬리에 머리태를 묶이여 끌려와 피못이 되고 의식을 잃은채 왜놈들의 불단에 화형당했다는 이야기를 마을의 어른들한테서 들었다며 《이런 력사사실들을 언녕 기록해놓아야 하는건데 ...》하며 내심의 유감과 자책을 감추지 않았다.
《여기 중평골에서는 혁명하다 희생된 렬사들이 많았습니다》하며 리로인은 허성숙, 박경도 등 항일렬사들의 이야기도 꺼냈다. 그리고 자기가 13세 되던 해 박락순이란 앞잡이놈을 차조촌(지금 중평촌에 합병)에서 총살하던 장면을 목격했다면서 눈을 반짝였다.《흰 조선옷 차림에 두손이 뒤로 묶이워졌는데 민중들이 〈저 나쁜놈, 천벌을 받을 놈〉하던것이며 그놈이 무릎 꿇고 총알에 맞아 거꾸러지는것도 보았다》면서 추억에 잠긴다.
최계옥렬사가 순난하던 그 《어구지》를 알만한 사람이 동흥툰에 혹 있을지도 모른다는 리로인의 말에 박씨형제는 귀가 번쩍해 한다. 《외할머니와 함께 한자리에서 피살된 큰이모부(최태훈)의 부친 최희경은 〈동흥유격분대〉 분대장이였으니 동흥사람들이 알지 않을가》 하며 박씨형제는 기대를 안고 중평 8대에 합병된 동흥툰으로 향했다.
마을의 원로라 할수 있는 왕전군(王殿君)을 찾다가 그의 아들 왕수삼(王树森, 61세)을 만났다. 우리일행이 찾아온 사연을 듣고 부친은 작고했으나 자기도 《그곳을 안다》고 대답하며 곧바로 나섰다. 그는 마을에서 300메터정도 떨어진 길어귀의 한 옥수수밭까지 와서 《이곳》이라고 지목한다. 항일하던 조선인 최씨네 한집식구 네명(一家四口)이 《이곳》에서 일본놈과 앞잡이에게 불에 태워 피살되였다는 이야기를 부친한테서 들었고 《그래서 어렸을 때는 우리또래들은 이곳을〈섬뜩해 했다〉(慎得慌)》고 표현한다.
중평촌의 로지부서기 리득명(왼쪽첫사람)로인과 동흥툰의 왕수삼(왼쪽두번째사람)로인이 최계옥렬사의 순난지점으로 점찍는 곳에서 박씨형제한테 구전해 들은 최계옥렬사의《전설》을 얘기하고있다./사진:김파기자
안타깝게도 리득명서기나 왕수삼은 동흥툰의 최희경네 조손3대가 혁명하다 모두 희생된 이야기와 그날 최계옥, 최희경 사돈간이 두 유격대원과 함께 순난한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고있었다. 리득명서기와 왕수삼 그리고 우리 일행은 《아마도 최희경 최계옥 두 사돈간이 한날 한시에 한자리서 두 전사와 함께 불에 타 순난한 이야기들이 겹쳐 〈한집식구4명〉이 일본놈들에게 불에 타 피살된걸로 오전(误传)되여내려온것이 아닐가》하는 추정으로 결론하게 되였다.
박씨형제는 리득명과 왕수삼이 들려준 이야기는 외할머니와 큰이모네집 이야기와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문필기록이 없이 80년 세월속에서 그렇게나마 구전(口传)해온 외할머니와 외가편 혁명력사이야기의 끝자락이라도 잡은것같아 박씨형제는 그나마 다행스러워했다.
박씨형제는 《외할머니가 저 산마루에서 우리를 굽어보시는듯하다》며 유난히 프르청청한 중평골의 산천을 보면서 《외할머니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에 모든것을 바쳐 넘나들던 산천이였구나. 외할머니는 80년간 형장에 봉분도 없이 묻혀진 대로였구나. 외할머니를 이곳에 묻은채 다시는 와보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은 평생 〈이곳〉에 와있었겠다...》며 눈굽을 찍는다.
《그 부근에만 가면 나는 〈외할머니자리〉를 대뜸 찾을수 있는데…》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귀전에 울린다며 박시형제는 《우리가 정말 잘못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한번이라도 왔더라면…》하고는 서로 뒤말을 잇지 못한다.
《우리세대가 꼭 완수해야 할 일, 이제 더 늦출수 없다》
우리일행이 중평골을 내려올 때는 늦은 점심시간이였다. 민정국으로부터 박씨형제가 외할머니 유적지답사를 왔다는 소식을 접한 안도현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김만춘주임도 뒤따라 석문진에 와 점심자리를 같이할수 있었다. 안도현 무장부 부장, 정협부주석으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한후 김만춘주임은 지금까지7년째 《안도현혁명사》를 정리집성하는 일에 혼신을 쏟고있는 분인데 허정, 박경도 등 무려 42명이나 되는 안도현 혁명렬사사적을 줄줄이 발굴정리해냈다고 리동국 민정국장이 소개한다.
외할머니와 외가편 이야기를 하면서 죄스러워하고 가슴아파하는 박씨형제의 마음을 읽은 김만춘주임은 《그런 분이 어디 귀 외할머니뿐이겠습니까? 이제라도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력사를 제대로 적어놓아야 하는 책임은 개인이나 정부나 어느 단체에나 국한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우리 선조들의 혁명이야기가 적지 않게 흔적없이 사라져가 안타깝기 그지없지요. 귀외할머니와 외가편의 혁명이야기는 조선족 혁명사를 잘 보여주는 비교적 전형적인 사례라고 봅니다. 귀외할머니의 순난사적은 일제놈들의 비인간적인 잔인한 죄장을 폭로하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철같은 사실이기도 하고요…》 라고 말한다.
김만춘(오른쪽 첫사람)주임이 최계옥렬사가족과 함께 최계옥렬사유적지답사를 나온 안도현 민정국국장리동국(왼쪽 첫사람), 문화국국장김건(왼쪽 두번째)일행에 중평골렬사발굴을 비롯한 렬사발굴정황을 소개해주는 장면이다./사진:김파기자
김만춘주임으로부터 중평골의 렬사를 비롯한 안도현내 혁명렬사 발굴정황과 렬사사적을 듣고 감동된 박씨형제는 외할머니와 외가편의 혁명이야기를 정리하는것이 단지 가문의 일만이 아니고 《우리세대들이 꼭 완수해야할 일이다. 이제 더는 늦출수 없다》는 추동을 받았다고 기자에게 토로한다.
귀로에 오르면서 80세나는 박증수옹은《이제라도 동생이 이 력사사실들을 빨리 정리해 내야겠소. 안그러면 우린 정말 조상을 만날 면목이 없을거요…》 하며 동생 박선생한테 정중히 당부한다.
 
제5편 -
색바래지는 삼도구혁명유적지를 찾아서
박씨형제가 외할머니의 항일전적지를 다녀온 2년만인 2013년의 봄날 , 안도현민정국으로부터 박선생한테 너무나 반가운 기별이 전해졌다. 안도현성의 토월산에 혁명렬사릉원을 신축하니 외할머니를 그곳에 이장해 모실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면 우선 렬사증 《이적》수속부터 해야했다. 최계옥렬사의 렬사증은 당시 적을 훈춘에 두고있었다. 박선생의 부모님이 훈춘으로 이사를 가면서 최계옥렬사의 렬사증도 처음에 발급한 《연길현(후엔 룡정시)》으로 되였던데로부터 훈춘시에로《이적》되여 있은 상태에 있었다.
7월 4일, 박선생은 훈춘시에 가서 외할머니의 렬사증 적을 다시 떼여와 안도현으로 《이적》하였다. 규정상 렬사의 적은 가속의 천이에 따라 천이될수 있다.
안도현민정국 류룡일사무원(왼쪽)과 외할머니렬사증 이적수속을 밟고있는 최계옥렬사의 외손자 박영철선생./사진:김영자
《이적》수속을 마치기까지 안도현 민정국 무휼과 류룡일사무원 및 석문진 민정조리원들은 한달사이에 박선생과 함께 최계옥렬사의 마지막 전적지인 동흥툰을 수차 다녀왔다.
허나 박선생은 외할머니가 삼도구에서 삼도만으로 넘어가려다 놈들에게 붙잡혔다는 그곳과, 외할머니가 넘어가려던 그 고개길을 다녀오지 못해 내내 속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었다.
렬사증 이적수속을 마친후 8월25일 박선생은 끝내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넘어가지 못한 그 고개길을 향해 나섰다. 기자와 조선족항일력사를 학습하는 화동사범대학 학생 김희정이 동행했다.
오도구에서 동흥툰 장귀림(왼쪽 세번째사람)등 로인들과 만난 최계옥렬사의 외손자 박영철(가운데 사람)./사진: 김희정
우리일행은 삼도구로 들어선다는것이 그만 오도구에 들어섰다가 그곳에서 마침 동흥툰의 80세에 나는 장귀림, 71세나는 왕수청 , 장문우 등 로인들을 만났다. 로인들은 최계옥렬사를 비롯해 구체적인 사건경위나 인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여기 삼도구, 오도구 일대서 조선인들이 항일하다가 많이 희생되였다는 사실만은 알고있다며 잔뜩 흥분해했다.
우리는 로인들이 알려준대로 오도구에서 나와 삼도구를 찾아 들어섰다. 서북쪽 산마루를 향해 반시간쯤 걸어올라가보니 로인들이 걱정하던 꽤 넓은 면적의 습지가 앞길을 막았다. 어떻게 건너갈가 살펴보고있는데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오토바이도 거기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멈춰섰고 대신 장화를 신은 한 30대 젊은이가 다가왔다. 알고보니 그 골안에 방목하고있는 소들에 소금 먹이러 가는 동흥툰의 촌민 장만력(张万力)이였다.
삼도구서 동흥툰촌민 장만력(왼쪽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외할머니가 당년 유격대를 찾아가던 길을 걷고있는 박영철선생. /사진: 김희정
그는 처음에는 의아쩍어 하며 우리를 보다가 연유를 듣고는 선뜻이 자기가 안내하겠다고 앞서 걸었다. 어렵게 습지를 지나 또 반시간 넘게 걸어도 서북쪽 산마루로 통하는 길은 나지지 않았다.
인적기 없는 적막한 삼도구에서 소방울소리가 정겨웠다. 도중 장만력의 소들을 만나 잠간 장만력과 함께 소에게 소금을 먹이고있는 박영철선생./사진:김희정
박선생은 턱에 닿는 숨을 몰아쉬면서 혼자말로 《외할머니가 놈들에게 잡힌 곳이 이쯤일가? 유격대가 활동하던 곳이겠다…》하며 앞뒤 좌우를 자꾸 살펴 본다. 박선생의 손에는 의지할 지팽이로 나무가지가 쥐여져있었다.
장씨도 《이 삼도구일대에 조선인들 유격대가 많이 활동했다는건 이곳사람들은 다 알고있다》면서 아름드리 나무를 바라보며 지난해 여기서 목재를 채벌했다고 한다. 그럴법하게 삼도구 골안에는 우람진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이윽고 장씨는 이미 8리쯤 걸었다고 알리면서 좀 패운 물곬이 보이는 곳을 가리켰다. 곬따라 이어진 숲길이 보일거라고 한다. 우리걸음으로 약 반시간가량 가면 삼도만과의 경계선으로 되는 산마루에 닿을수 있다면서 장씨는 우리와 작별했다. 장씨가 아니였다면 우린 산길을 헤치고 거기까지 가기가 쉽지 않았을것이다.
나무가지를 지팽이로 의지해 당년 외할머니가 채 올라가지 못한 올리막 숲속길을 톺고있는 박영철선생/사진:김희정.
장씨와 헤여진후 과연 반시간만에 우리는 삼도구와 삼도만의 변계선이라는 산마루에 이르렀다.
산마루북쪽으로 내리 오솔길이 보였다. 삼도만으로 내려가는 길 같았다.
박선생은 한참동안 말씀이 없었다. 우리는 유격대통신원으로 있으면서 당년 이런 적막하고도 무시무시했을 산길을 수없이 넘나들었을 최계옥렬사를 떠올리면서 가슴이 찡해났고 숙연해졌다.
정작 소 방목이나 할만치 세상에 외면되여간 삼도구를 올라오면서, 이 땅에 떨어져 묻혀진 한잎 락엽처럼 이 심심산골에 소리없이 묻혀진 영령들을 어떻게 고위(告慰)해야 할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박선생은 한참만에 《이런곳에 기념패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진작 자손들을 데리고 이 길 한번 답사하지 못한 유감이 뇌리를 때린다》고 기자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삼도구서 내려온 박선생은 곧바로 외할머니의 순난지로 향했다. 그 순난지에서 박선생과 우리는 오래도록 고개숙이고 묵념했다. 최계옥렬사와 혁명선렬들의 혁명정신이 과연 어떤 힘이였는지를 알것만 같았다. 박선생은 외할머니의 순난지를 이번까지 네번째로 찾은것이였다.
제6편 -
두세대에 걸쳐 81년만에 올려진 녀렬사의 귀안제
삼도구길을 다녀온 한달후인 2013년 10월 1일, 박선생은 목메인 목소리로 기자에게 알린다.
《10월 3일 외할머니묘소를 토월산렬사릉원에 만들어드리게 되였습니다!》
안도현민정국으로부터 외할머니를 이장할 시일을 10월 3일로 배치하는것이 어떠냐는 상의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10월3일, 박선생의 형님내외와 동생, 최계옥렬사의 시조카딸인 최금자로인과 최계옥렬사의 손자촌수인 조영진내외가 아침 일찍이 토월산렬사릉원에 도착했다.
양지바르고 대리석구조로 산뜻이 마련된 단묘묘지 첫줄 다섯번째 묘소자리가 《최계옥렬사》앞으로 배정된 자리였다.
최계옥렬사 이장 전반 절차는 안도현 민정국에서 주관해주었다. 중공 안도현위원회와 현인민정부에서 그날 최계옥렬사 령전에 화환을 보내왔다. 안도현 민정국에서는 렬사들을 이장하는데 납골함을 통일로 제공해주는 세심한 배려까지 돌려주었다.
외할머니 순난지서 제를 올리고 흙을 뜨는 박영철선생/ 사진:김희정
그럼에도 박선생은 형제들과 어머니의 마음까지 담아 납골함을 손수 마련해 외할머니 유해가 묻혔던 자리의 흙을 정히 떠담아왔다. 납골함 두껑 안쪽에다는 외할머니의 아들 최동호사진과 할머니의 세딸이 함께 찍은 사진도 방수처리까지 해서 정히 붙여넣었다.
드디여, 최계옥렬사는 희생된지81년만에 당과 정부의 배려로, 자손들의 손길에 받들려 해빛밝은 토월산혁명렬사릉원에 이장 귀안하였다. 렬사의 후손들은 선렬의 령전에서 제례를 갖추어 영령의 불후의 공훈을 기리며 명복을 빌었다.
례의를 갖추어 토월산혁명렬사릉원 최계옥렬사의 묘소앞에서 외할머니께 81년만에 첫 추모제사를 지내드리는 최계옥렬사의 후손들./사진:왕숭림(연변주검찰원)
외할머니묘소에서 내려오는 박선생한테서 그렇게 홀가분하고 그렇게 행복에 겨워하는 표정을3년만에 처음 보았다.
박선생도 그 형제분들도 방불히 외할머니슬하의 어린시절로 돌아간듯 했다. 여직 말수 적었던 박선생의 형님은 《할머니앞으로 오는 걸음이여서인지 내가 오늘 몸도 가볍고 다리도 말 잘듣는다》며 가볍게 우스개도 피운다. 형수님도 동생들도 그러는 형님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외할머니가 그날 밤 찾아오실때 때 요람속에 있었던 형님이였는데 …》 하며 모두들 다시 깊은 감회에 잠겨든다.
《혁명렬사들은 영생불멸하리라》라는 글발이 빛나는 렬사릉원 기념탑아래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최계옥렬사의 후손들./사진:왕숭림
렬사릉원을 나와 차에 오른 박선생네형제들은 차창너머 렬사릉원쪽으로 눈길을 떼지못했다.
박선생은 《이제 우리 자식들이 여기를 잊지말고 찾아와야 하는데…》하고 정적을 깬다.
박선생의 형님, 형수도 이때라 하고 외국에, 외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 얘기를 하나하나 꺼냈다.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이런 소중한 날에도 얼굴을 못 내미는 자손들이 다들 무척이나 맘에 걸리는 심정이 력력했다.
이날 사정상 외할머니의 이장제에 참석하지 못한 목단강에 있는 박선생 누님네까지 박선생형제의 자식대가 총 9명인데 미국, 한국, 일본에 정착한 자식이 4명, 북경 등 도시에 나가 정착해 있는 자식이 4명이였다.
그중 박선생네 두자식 중 딸은 미국에, 아들은 한국에 정착해 있다고 한다. 그 다음대로 박선생은 외손자 셋에 손녀와 손자까지 손군을 총 5명 두고있는데 다 국외에서 태여나 국외에서 자라고있는 경위이다.
대학에서 영화연출과를 전공하고있는 박선생의 외손자가 한번은 전화에서 《일제가 중국에서 저지른 죄장을 이야기해줄만한 일반 민간인들을 만나거나 통화라도 하고싶은데 주선해주세요》하는 청을 해와 박선생을 실언케 한적이 있었다고 기자에게 실토한다.
그렇게 가문의 소중한 력사를, 민족과 나라의 처절한 력사를 너무도 모르고 커가는 신세대들을 생각하면서《이건 아닌데…》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또 박선생은 커가는 손군에게 언제부턴가 《걔네가 외할머니영화를 훌륭하게 만들지도 모르지…》 하는 기대를 걸고있다며 새해엔 연길에 다녀가기로 했다는 미래의《영화감독》 외손자를 무척이나 기다리는 눈치였다.
귀로에로 자가용을 운전하며 박선생은 기자에게《이제 외할머니의 렬사증은 내손에서 누구한테 맡겨야 할지…》라고 혼자말처럼 한다.  / 길림신문